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사실을 처음 체계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조선 후기 서자 출신 학자 유득공입니다. 친구에게서 "우리 조상이 아니었으면 역사책에서 발해라는 이름을 찾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건 그냥 학문적 업적이 아니라 역사의 경계선 자체를 다시 그린 일이었습니다.

발해고 — 조각조각 흩어진 나라를 한 권으로 꿰매다
제가 직접 발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발해에 대한 기록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점이었습니다. 고구려나 신라는 국내에 자체 역사서가 남아 있고, 고려와 조선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방대한 관찬사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발해는 자국이 남긴 역사서가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200년 이상 번성했던 나라가 기록 면에서는 거의 공백 상태였던 겁니다.
조선 전기의 관찬사서인 《동국통감》은 단군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담으면서도 발해를 자국사와 무관한 주변국의 역사로 분류했습니다. 여기서 관찬사서(官撰史書)란 국가가 주도해 편찬한 공식 역사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나라에서 공인한 역사책인데, 그 책조차 발해를 우리 역사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련 기사가 13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유득공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면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규장각(奎章閣)은 정조 임금이 설립한 왕실 도서관 겸 학술 연구 기관으로, 국내 문헌은 물론 중국의 역사서, 지리서, 외교문서, 심지어 일본의 기록까지 방대한 자료가 집결된 곳이었습니다. 유득공은 그 수많은 문헌 속에서 중국 역사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발해 관련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냈습니다. 왕의 이름, 신하의 이름, 수도와 지방 제도,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까지. 파편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 나가며 발해의 뼈대를 다시 세운 것이 바로 《발해고(渤海考)》입니다.
《발해고》에서 유득공이 특히 강조한 개념이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입니다. 남북국시대란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북쪽에 발해가 병립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입니다. 그는 "김 씨가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북쪽을 차지하여 발해라 하였으니 이들이 남북국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는 신라 단일 왕조의 시대로만 배웠던 제 경험상, 이 인식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강역을 한반도를 넘어 만주 일대까지 확장하는 관점이었으니까요.
- 《발해고》는 임금·신하·지리·관직 등 9개 항목으로 발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작입니다.
- 자체 역사서가 없던 발해를 타국 문헌의 단편 기록에서 복원해냈다는 점에서 사료 비판적 방법론을 선구적으로 적용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 유득공은 책을 낸 뒤에도 오류를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확인하며 보완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발해고》의 영향은 한치윤, 정약용 같은 당대 실학자를 거쳐 박은식, 신채호 같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자로 이어졌습니다.
규장각 검서관 — 신분의 벽 앞에서도 학문은 멈추지 않았다
친구가 "문화 유씨"라고 했을 때 처음엔 문화라는 지명이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유득공이 바로 그 문화 유 씨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지명이고 성씨고 다 나중 문제가 됐습니다. 그보다 먼저 제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처했던 신분적 조건이었습니다.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던 탓에 그 역시 서자(庶子)로 태어났습니다. 서자란 양반의 자손이면서도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직 진출과 사회적 활동에서 심각한 제약을 받는 신분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는 양반인데 본인은 양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당시 조선에서는 흔하고도 불합리한 구조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신분제 이야기를 역사책에서 읽을 때는 그냥 배경 지식처럼 넘겼는데, 실제 인물의 삶에 붙여 보니 그 무게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유득공이 활동한 18세기 조선은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이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북학파란 청나라의 문물과 기술, 상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자고 주장한 지식인 그룹으로, 관념적인 성리학에서 벗어난 실용적 사고가 특징이었습니다. 유득공은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 북학파 계열 실학자들과 평생 학문적 동지로 지냈습니다. 이 그룹에는 정통 양반뿐 아니라 유득공처럼 서자 출신들도 함께하며 새로운 지적 풍토를 만들어 갔습니다.
1779년, 유득공의 나이 32세에 정조 임금이 그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합니다. 검서관(檢書官)이란 수많은 문헌을 검토하고 분류하며 오류를 교정하고 새로운 서적을 펴내는 국가 편찬 사업의 핵심 직책을 말합니다. 함께 등용된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까지 네 명 모두 서자 출신이었고, 이들을 '사검서(四檢書)'라고 부릅니다. 정조가 신분보다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모으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준 인사였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의 규장각 관련 자료에서도 사검서의 활동이 당시 조선 지식 생산의 핵심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득공은 정조가 승하한 뒤 풍천 부사직에서 물러나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규장각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정책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고, 사 검서관이 활약하던 황금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정조가 떠나고 7년 뒤, 유득공도 예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개혁의 실질적 토대를 만든 서자 출신 학자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됩니다. 제 경험상 이 점이 꽤 아쉬웠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DB를 통해 《발해고》 원문을 직접 열람할 수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발해고는 언제 쓰인 책인가요?
A.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에 초고가 작성되었습니다. 이후 유득공은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추가하는 보완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갔기 때문에, 단번에 완성된 저작이라기보다는 평생에 걸쳐 다듬어진 학문적 결과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Q.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건 유득공 이전엔 아무도 몰랐나요?
A. 발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까지는 발해를 자국사와 무관한 주변국으로 취급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놀라운 대목이었는데, 조선의 공식 역사서 《동국통감》조차 발해 관련 기사가 13건에 불과했을 정도입니다. 유득공이 처음으로 발해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체계화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이런 맥락에서 나옵니다.
Q. 남북국시대라는 말은 교과서에도 나오나요?
A. 현재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병렬로 서술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 인식의 뿌리가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입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발해의 정체성과 귀속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교과서의 서술이 유득공의 주장 그대로라기보다는 그 영향을 받아 발전된 형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Q. 유득공 묘는 어디에 있나요?
A. 경기도 의정부시의 야산에 문화 유씨 종중 묘역이 있고, 유득공의 묘도 그곳에 있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문화유씨 후손들이 묘역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문화 유씨 친구와의 대화가 계기였는데, 그런 뜻밖의 연결고리가 역사를 훨씬 가깝게 느끼게 해줬습니다.
결론
우리가 발해를 당연한 우리 역사로 여기는 것, 삼국시대 이후에 남북국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240여 년 전 규장각의 수많은 문헌을 뒤지던 서자 출신 학자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친구와의 우연한 대화에서 시작해 유득공을 찾아보면서 깨달은 건, 역사는 그냥 쌓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찾아내고 체계화해야 비로소 살아남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역사 기록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 사료 비판을 통해 단편 기록들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는 일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발해처럼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역사적 공백이 어디에 더 있는지, 한 번쯤 관심을 갖고 들여다볼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